"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인물, 그가 남긴 '정의'는 무엇인가?"
2025년 7월 10일, 우리 역사 속에서 뜨거운 논쟁과 함께 '정의'의 한 장면을 만들었던 인물, 박기서(朴琦緖) 씨가 향년 77세로 별세했습니다. 경기도 부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유족의 소식은, 그가 남긴 잊을 수 없는 '행보'를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박기서 씨의 이름 앞에는 늘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인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과연 백범 김구 선생은 어떻게 비극적으로 서거했으며, 그 암살범 안두희는 어떤 인물이었고, 박기서 씨는 왜 그를 직접 '처단'하기에 이르렀을까요?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삶은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오늘은 이 세 인물의 교차하는 운명과, 역사적 정의를 향한 박기서 씨의 발자취를 상세히 조명해 보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극적 서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남북 협상을 추진하는 등 통일 정부 수립에 헌신했죠.
- 암살의 순간: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은 서울 서대문 인근의 자택인 경교장(現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권총에 맞아 서거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존경받던 독립운동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 배경 의혹: 당시 안두희는 김창룡(1920~1956) 특무부대장의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하며 배후 세력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우발적 범죄가 아닌, 정치적 배후가 있는 암살이라는 의심을 낳았고, 한국 현대사의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암살범 안두희(安斗熙), 파란만장한 삶과 의문의 죽음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이후 기이하리만큼 순탄한(?) 삶을 살며 수많은 의혹을 증폭시켰습니다.
- 재판과 석방: 그는 김구 선생 암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형되었고, 1951년 2월에는 옥에서 풀려나 사면까지 받았습니다.
- 군 복귀와 사업: 풀려난 안두희는 심지어 군에 포병장교로 복귀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암살 배후와 관련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진술을 번복하는 등 진실을 흐리게 했습니다. 그는 군을 제대한 뒤에도 군납 사업 등으로 부를 축적하며 의문투성이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 대중의 분노: 이처럼 김구 선생의 암살범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듯한 모습은 많은 국민, 특히 백범을 존경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분노와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정의봉'으로 역사를 바로잡다: 박기서 씨의 '처단' 행보
이러한 분노와 불의에 맞서 직접 행동에 나선 이가 바로 박기서 씨였습니다. 그는 평범한 시내버스 기사였지만, 김구 선생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안두희를 향한 분노로 역사적 심판을 자처했습니다.
- 처단의 순간: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 씨는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안두희의 집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정의봉'이라고 적힌 40cm 길이의 몽둥이로 안두희를 때려 살해했습니다. 당시 안두희는 80세로 고령이었습니다.
- 자수와 소회: 범행 후 불과 7시간 만에 경찰에 자수한 박기서 씨는 "백범 선생을 존경했기에 안두희를 죽였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당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자신의 범행 동기를 밝혔습니다. 그의 행동은 당시 '사법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역사적 불의를 개인이 바로잡았다'는 평가와 함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 재판과 사면:
- 박기서 씨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11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3년형을 확정받았습니다.
- 하지만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 석방 이후의 삶: 석방된 박기서 씨는 다시 소신여객 버스 기사로 일했으며, 2002년에는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여 부천 지역에서 택시 기사로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 '정의봉' 기증: 2018년에는 자신이 안두희를 처단할 때 사용했던 '정의봉'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는 그가 남긴 행동의 의미를 역사 속에 길이 남기고자 한 뜻으로 풀이됩니다.
박기서 씨, 그가 남긴 '정의'의 의미
박기서 씨의 별세 소식은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 '정의'란 무엇인가, '역사적 불의'는 어떻게 기억되고 청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개인이 실현한 정의"이자 "법이 외면한 정의를 바로잡으려 한 의로운 행동"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원미자 씨와 1남 1녀(박안숙·박찬종), 사위 박기훈 씨 등이 있습니다. 빈소는 부천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7월 12일 오전 5시, 장지는 남양주 모란공원입니다.
박기서 씨의 삶과 행보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와 '정의'를 향한 개인의 숭고한 의지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됩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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